다각형의 예술가로 살아가기

인천시 블로그 지역문화가 기고 글(2021)
처음 만나는 사람이 나에게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하기에 앞서 정신이 아득해진다. 저는 가끔 전시회를 여는 시각 예술가이기도, 의뢰를 받고 그림을 그려주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편집디자이너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장황하게 말하기에는 어딘가 계면쩍어 그냥 그림도 그리고 이것저것 한다고 얼버무리고 만다. 그럼, 사람들은 나에게 부럽거나 멋지다고들 툭, 하고 답한다. 지나가는 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쑥스럽기도, 부끄럽기도 하여 그냥 웃음으로 때워 버리고 만다. 다른 대답을 덧붙이고 싶은 마음이 들긴 하지만 깊게 이어지지 않을 인연들에게 나에 대해 가타부타하기에도 귀찮은 마음이고, 그들이 내 삶에 대해 상상하는 것들을 애써 깨고 싶지도 않다.
오직 그림에만 열중하는 예술가로 살아가며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간결하게 말하고 끝내 버리면 좋으련만. 나는 가진 것 많은 집에 태어난 자식도 아니거니와 한 평짜리 공간에서 처절하게 창작에만 집중하며 살아갈 열정적인 성정을 지닌 사람도 아니다. 나는 도형으로 치자면 둘레가 일정한 원도, 정사각형도, 정삼각형도 아닌, 그냥 제각기 다른 변과 각도를 가진 다각형의 인간이다. 상황에 따라 어느 틈에 나를 맞춰야 할 일이 있으면 그때 마다 나는 그곳에 어울리는 각을 찾아 나를 맞추어 들어간다. 그게, 빠듯한 현실에서 내가 겨우 예술가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인천에서 보냈다. 이 시간은 내 생의 반절이 훌쩍 넘는다.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내 생애 수많은 추억들이 깃든 곳이니 인천이야말로 내가 느끼는 진짜 고향이 아닐까 싶다. 이 도시에서 나는 그림을 처음 배웠고, 예술가를 꿈꿨다. 풋내 나는 열망들이 모여 어리숙하지만, 그런대로 열심히 꿈을 좇는 모양새로 살아가고는 있다.
나는 서울 은평구와 마포구를 거쳐 지금은 인천의 미추홀구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지내는 중이다. 사실 서울에서 인천으로 작업실을 옮긴 것은 집과의 거리 문제도 있었지만, 해마다 올려달라는 작업실 월세 부담이 이유의 1순위였다. 집에서 가까운 작업실을 마련하고자 했지만, 가지고 있던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다. 작업실 커뮤니티를 헤매고 헤매다 지금의 작업실을 만났다. 공단종합시장 내에 위치한 작업실은 겉보기에는 허름할지라도 작업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물론, 저렴한 월세가 이 곳에서 지내는 이유의 큰 몫이지만.
낡은 건물을 허물고 이곳이 재개발된다면, 비싼 임대료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난 이곳을 떠날 채비를 할 테고 좀 더 저렴한 임대료의 공간을 찾아 헤맬 것이고. 분명하게 그려지는 이러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이 공간을 유의미하게 쓸 수 있게 해준 이 시간들을 감사해 할거다.
창작 공간과 관련하여 인천문화재단 창작지원부에서는 예술가들을 위한 ‘예술인 창작공간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과 관련하여 나는 작년에 혜택을 받았다. 월세의 50%를 6개월간 지원해주는 것이 사업의 주된 내용이다. 기존의 월세가 워낙 적어, 받은 혜택의 금액도 적긴 했지만 고정 지출이 줄어든다는 것은 나 같은 비정기적인 수입을 갖고 있는 예술인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한 번 사업에 참여한 예술인은 다음 해에는 지원을 할 수가 없어 아쉬웠지만, 더 많은 인천의 예술인들이 이런 사업의 혜택을 두루 받는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라 생각한다.
2019년에는 인천 서구문화재단 주최로 이루어진 아트큐브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서구에 위치한 유휴공간을 갤러리 공간으로 조성한 다음 시각 예술가들을 선정하여 전시 지원을 해주는 것이 요지다. 작가 개인으로서는 접근성 좋은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것에 대한 욕심이 어느 정도 있다. 사람들이 많이 활보하는 인사동이나 홍대 같은 위치에서도 갤러리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한참이나 적은 데, 동네 한 켠에 비어있던 공간이 갤러리로 탈바꿈했다고 해서 그곳에 오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겠는가 하는 것이 프로젝트 시작 전의 내 솔직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다음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미술 전시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역에서 이런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것이 당장에 눈에 띌 만한 성과는 없을지라도, 이 작은 첫발이 모여 더 나은 문화예술 도시로 나아가는 데에 그 기점이 될 것 임을 전시를 끝마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그 발자취의 일부분을 함께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예술가로서의 인생에서 인천은 나도 모르는 새 내 기반이 되었다. 내 그림에 대한 확신에 없었던 찰나에, 나에게 가능성이라는 글자로 날 북돋아 준 2017년 부평구 문화재단의 4기 영아티스트 선정 작가전과 부평 화이트 옥션 참여 등은 나에게 다양한 사람들과 기회를 만나게 해준 장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내가 가진 각들이 모마 되어가면서 제대로 된 원형의 예술가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내 오랜 소원이다. 하지만 그전까지 나와 같이 다각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예술인들을 위해 더욱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들이 마련되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임찬미(b. 1988)는 경희대학교 예술디자인대학 시각정보디자인학과를 졸업했다. 임찬미는 부천문화재단 청년예술가S(2020, 부천)에 선정, 인천서구문화재단 아트큐브 프로젝트(2019, 인천), 제 5회 청계천 업사이클 페스티벌 류(2019, 서울), 장욱진 시립미술관 뉴 드로잉 프로젝트(2019, 양주), 아시아프(2017, 서울), 부평문화재단 영아티스트 선정작가(2017, 인천)를 비롯한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